과거와 세상에 빚진 자
위계사회로서의 일본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것은 이들이 가진 '온'(恩) 개념입니다. (우리말로는 은혜, 또는 은덕이라고 번역하는 게 적당할 듯 합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은혜 내지는 사랑(아이, 愛)를 베풀고, 아랫사람은 그 은덕을 갚기 위하여 늘 노력한다는 그런 개념입니다. 가까이에는 나를 길러준 부모의 은혜, 그리고 봉건사회에서 내가 모시는 직속 상관, 영주, 더 나아가서 서열의 정점에 있는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채무의식을 일본인들은 늘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베푸는 서양식 사랑 개념과는 극히 대조적입니다.
이렇게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나로 하여금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채무의식을 심어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앞에 열거된 대로) 내가 속한 서열체계의 위에 있는 사람, 또는 나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만일 그 외에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면, 이는 나에게 부당한 채무를 지우는(, 즉 나를 멕이는)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감사 인사는 아리가토(왜 쓸데 없이 오버를 해서 나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거냐 이 인간아 어려움이 있네요), 스미마셍(괜히 나한테 은혜를 베풀어서 보답하려면 한도 끝도 없겠잖아 끝나지 않아요) 가타지케나이 (아이 쪽팔려 고맙습니다.) 등 이게 감사인지 돌려까기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은원관계(?)를 청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댓가를 수반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베네딕트 선생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예화로 인용합니다. 주인공은 자기한테 얼음물 한잔 대접한 친구가 뒤에서 자기를 욕했다는 이유로, 그 친구를 찾아가서 잘잘못을 따지기전에 우선 친구가 냈던 물값부터 그 친구에게 돌려줍니다. 초딩 도련님? 일단 ‘온’으로 얽힌 관계를 끝내야 동등한 입장에서 상대와 맞설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 겁니다. 자식들한테 잘 하며 독신으로 지내다 늘그막에 같이 논 어린 창녀를 집에 데려오고 싶은 어느 노인의 상담 요청에 대한 한 일본 정신과 의사의 답도 비슷합니다. 창녀를 돌려보내든지, 창녀와 같이 살고 싶다면 재산 상속을 확정하고 자식들이 나에게 대해 가진 환상을 확실하게 깨서 자식들이 더 이상 나에게 그 동안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을 안하도록 만들어야 옳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그 동안 노인이 자신들을 키워주고 수절한 것으로 인하여 ‘온’을 입고 이를 보답하려 노력하고 있었던 바, 이러한 관계를 깨버리는 노인의 재혼에 반기를 드는 건 극히 당연하다는 것.
그래도 일본인들의 정신세계가 이해가 안된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의 ‘온’ 개념은 금전적 채무관계와 똑같다고 이해하면 된다며 루스 베네딕트 선생께선 막판에 꿀팁을 주십니다.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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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챕터를 읽으며 마음이 좀 복잡해졌습니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호의를 베풀어 주었을 때 고맙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니가 뭔데 하면서 고까와 하곤하는 나 자신의 못난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은혜니 부모의 은혜니 국민교육헌장이니 하면서 아랫 것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윗사람을 떠받들라는 무한책임(?)을 지우려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교육방식이 알고보면 왜색이었는가 하는 의구심도 새록새록 듭니다요.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도 일본식 표현인지?
전에 시마과장이라는 일본 만화를 보다가 의아했던 부분. 재벌 하츠시바 회장의 딸이 회사 주식을 많이 받은 자기 아버지의 애첩한테 찾아가서 따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첩에게 자기를 굳이 ‘신세진 요시와라 회장의 따님’으로 불러야 한다고 다그치죠. 그리고 그 직후 펼쳐지는 대혈투 애첩이 자기 아버지에게 승은을 입었으니 그 '온'을 갚기 위해 그 딸인 자기 역시 윗사람으로 끝없이 받들어야 한다는 뉘앙스였다는 걸 이 책 덕분에 이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