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람 "판소리 정서가 한이라는 데엔 정말 반대… 그 안엔 희로애락 다 있죠" (20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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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람 "판소리 정서가 한이라는 데엔 정말 반대… 그 안엔 희로애락 다 있죠" 2011-08-17
3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다양한 음악 커리어를 쌓아온 소리꾼 이자람(32). 그는 5세 때 '예솔이'를 불러 스타덤에 올랐고, 18세 때 8시간에 걸쳐 판소리 '심청가'를 완창했다. 대학 시절에는 인디밴드 보컬로도 살았고 뮤지컬 무대에도 섰다. 라디오 디제이로도 활동해봤고 창작 판소리도 만들었다. 4년 전에는 '사천가'를, 올봄에는 '억척가'를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렸다.
"다양한 경험을 많이 했지만 제 정체성은 '소리꾼'이에요. 저는 판소리가 가장 좋거든요."
이자람은 11세 때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심봉사가 눈을 뜨는 대목을 기가 막히게 잘 불렀던 고(故) 은희진 선생, 춘향과 어사또가 상봉하는 장면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던 고 오정숙 선생 등 시대의 명창들이 그를 특히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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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람은 "전통이란 옛것을 순수하게 재현해 박물관에 보관하는 게 아니라 동시대와 호흡하며 중요한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라며 자신의 판소리에퓨전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거부했다.
[100℃ 인터뷰] 판소리극 '사천가' '억척가'로 주목 젊은 소리꾼 이자람
가히 '이자람 현상'이라 할 만하다. 대중에게는 여전히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로 시작하는 동요 '내 이름'을 부른 꼬마숙녀로 더 친숙하지만 어느새 젊은 소리꾼 이자람(32)은 누구나 손꼽는 국악의 미래로 성장했다.
2007년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재창작한 판소리극 '사천가'를 극작, 작창, 음악감독, 출연까지 도맡아 선보이더니, 올해 6월에는 역시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각색한 판소리극 '억척가'로 화제를 모았다. 작곡과 작창은 기본이고 1인 15역의 연기까지 훌륭히 소화한 '억척가'는 국악 공연으로는 보기 드물게 전회 매진됐다.
현대적인 그의 판소리극을 향한 국외의 관심도 뜨거워 '사천가'는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초청 공연을 가졌다. 프랑스어 희곡집으로도 발간됐고 지난달 전세계 공연 관계자들이 모인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오프에서 공연됐다.
_'사천가' '억척가'는 어떻게 탄생했나.
"'사천가'의 발단은 '판소리가 21세기까지 창작됐다면 어떤 것을 사용했을까'라는 의문이다. 판소리가 시조나 민요 같은 당대의 좋은 것들을 써서 엮은 형태인 만큼 오늘날 사용할 수 있는 조명, 음향 등을 적극 활용하려 했다. 반면 '억척가'는 전통 판소리 중에서도 음악이 가진 깊이, 사설이 가진 깊이의 맛을 내보려고 했다. '사천가'가 멋모르고 만든 '이 시대의 판소리라면 어떨까'였다면 '억척가'는 '사천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깊이 있게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작창이나 대본 작업에 적벽가의 좋은 대목을 많이 듣고 연구하고 대본과 가사를 봐 가며 만들었다."
_수많은 작가 중 왜 브레히트의 작품이었나.
"'사천가'를 만들 때만 해도 브레히트가 누구인지 잘 몰랐다. 연극이라는 장르에 동경심과 경외감, 열등감이 있었고 희곡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몰랐던 때다. 다만 연출자와 착하게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던 중 우연찮게 '사천의 선인'을 선택하게 됐다. 이후에 브레히트 관련 논문을 찾아보고 위대한 작가임을 알았다."
_그럼 '억척가'는 브레히트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가."실은 '사천가' 공연을 마치고 나니 브레히트를 잘 모르고 만들었는데 '판소리와 브레히트의 만남'에 집중되는 게 부담스럽더라. 그래서 처음부터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차기작으로 염두에 뒀지만 오히려 브레히트를 피하려고 망설였다. 일부러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고전을 많이 찾아 읽었다. 브레히트를 피하고 싶었지만 내 마음이 자꾸 '억척가'를 하라고 하더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자니 아무 일도 못하겠기에 남 신경 안 쓰고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선택하게 됐다."
_우리 시대를 직접적으로 논하는 판소리도 만들 수 있다는 건가.
"판소리 만들 때는 순서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가 제일 먼저다. 내 마음의 갈등이 무엇이고 어떻게 지인과 이야기하고 싶은가가 시발점이다. 그런데 시대를 풍자하려고 판소리를 만들지는 않지만 내가 사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풍자를 하게 되더라."
_현대적인 판소리를 시도한 것에 대해 국악계의 반대는 없었나. 정통성의 시비랄까.
"국악하는 어르신께 직접적으로 들은 적은 없다."
_간접적으로는 들었다는 건가.
"국악평론가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이자람이 정통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다. 물론 당황스러웠다. 나는 지금도 인간문화재 송순섭 선생님의 교육을 받고 있는데 화려하게 비치는 외부 활동만 보신 것 같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비판을 들은 게 아니어서 개의치 않고 그저 내 발전의 거름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 분들은 아마 내가 소리 레슨을 하지 않는 것도 모를 것이다."
_돈 버는 일인데 레슨은 왜 안 하나.
"돈을 쉽게 벌 수는 있겠지만… 내가 가는 길이 앞으?판소리를 할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국악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해 서울대에서 학사, 석사를 마쳤고 상도 많이 받았다. 어떻게 보면 판소리에서 정도를 걸었다.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제자를 양성하고 교수가 되는 것보다 좀 더 좋은 소리를 만들어 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봤다. 내가 판소리가 좋았던 이유는 동시대성이었다. 그 동시대성을 지금 살려낸다면 더욱 재미있게 판소리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자람이 국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예솔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절이다. 어린이 국악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첫 스승인 고 은희진 명창을 만났다. 인간문화재 고 오정숙 명창과 송순섭 명창에게도 소리를 배웠다. 지금도 송 명창에게 흥보가를 배우고 있다.
국악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최연소, 최장기 판소리 완창'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국악 한 가지 영역에 머물기에는 주체 못할 끼를 품고 있다. 현대무용 공연에 무용수로 참여하기도 했고 밴드 활동도 하고 있다. 아비뇽에서 돌아온 직후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보컬로 공연을 했고 현재 밴드의 앨범을 녹음 중이다.
_'사천가'와 '억척가'의 1인 다역 연기를 보니 그 끼를 어떻게 참고 지내나 싶다. 국악을 하면 절제하는 생활을 하지 않나.
"전혀 그렇지 않다. 끼가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관심사가 생기면 그냥 두지는 않는 성격이다. 희곡에 흥미가 생기면 찾아 읽고 관련 강좌를 청강하고 무대화할 방법을 생각해 본다. 움직임을 배우고 싶으면 현대무용 워크숍에 참여해 보고 그러다 운이 좋아 현대무용 공연에 무용수로 서 보기도 했다."
....이자람의 판소리가 주목 받는 이유는 '판소리는 고루하다'는 편견을 깼기 때문이다. '사천가'와 '억척가'는 특히 20, 30대 관객이 열광했다. 젊은 소리꾼으로서 그는 대중이 품고 있는 판소리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싶어했다.
_'서편제' 등 영화 때문에 판소리의 정서가 한이라는 대중적 인식이 강하다.
"판소리의 정서가 한이라는 것에는 정말 반대다. 판소리를 논할 때 음악만 논할 수 없듯이 판소리는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한의 정서만 이야기 하겠는가. 사람의 삶에는 희로애락이 다 있듯 판소리도 신명 날 때 신명 나게 놀고, 풍자할 때 풍자하고, 화날 때 화내는 것이다."
_'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나.
"어느 부분은 맞다. 하지만 한국적이기 전에 내가 있어야 하지 않나. '사천가'의 뚱뚱한 여자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겪는 아이러니를 프랑스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상하더라. 한국적이라 할 수 있는 판소리의 테크닉을 이야기의 틀에 넣었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가 난 것이다. 가장 나다운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_앞으로의 목표는.
"일단 건강해지고 싶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지켜서 '사천가'와 '억척가'를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잘 해내고 싶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지금처럼 서로 바라보고 믿어 주고 좋아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 죽기 전에 내가 스스로 다 써 낸 판소리를 만들고 싶은 것도 꿈이다. 새로 썼다 해도 어쨌든 '사천가'와 '억척가'는 뼈대를 어디선가 가져 온 것이니까 내공을 키워 언젠가는 그 뼈대를 스스로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