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때 백과사전서 서울의 한자 표기 찾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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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2001.04.12 /1648호
[학술] 영조때 백과사전서 서울의 한자 표기 찾았다
서지학자 김시한씨, 2년여 노력 끝 '증보문헌비고' 기록 발견
우리나라의 모든 행정구역은 한자 표기가 가능하지만 오직 한 곳, 한글전용으로만 통용되던 수도 서울의 한자 표기가 '徐울(초두 밑에 宛)'이라는 결정적 문헌이 한국고서연구회 이사이자 서지연구가인 김시한(70ㆍ경안서점 대표)씨에 의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 서울의 한자표기가 '徐울(초두 밑에宛)'임을 입증하는 '증보문헌비고'의 문장. 문제의 문헌은 조선조 영조 때 어명에 의해 정부가 편찬한 전통문화 대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 이 책의 14편 여지고 2항 신라편에 ‘여지승람에 후인들이 모든 서울을 일컬어 서벌이라고 했다가 후에 변하여 서울로 했다’는 대목이 수록돼 있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10년 전부터 서울의 한자 표기법을 찾아나서기 시작한 서지학자 김시한씨는 그동안 서울의 한자 지명이 ‘徐울(초두밑에 宛) ’이라는 10여종 이상의 자료와 사료를 발굴하여 학계와 언론에 소개했다. 그런데 이 사료들은 정통성이나 권위를 인정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어 학계에서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공인하지 못해 왔던 것이 현실이다.
이 와중에 조선 정부가 공식으로 간행한 권위있는 문헌에서 서울의 한자가 ‘徐울(초 두 밑에 宛)’이라는 사실이 최초로 발견됨으로써 서울의 한자 지명 선정 작업이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김시한씨가 ‘증보문헌비고’에 서울의 한자 표기가 이렇게 수록돼 있다는 단서를 잡은 것은 조선 영조시대에 편찬된 유득공의 ‘21도 회고시’에 수록된 시를 통해서였다.
단군조선부터 고려 때까지의 고도 21곳을 시로 회고한 이 시집의 신라편에 수록된 작품 중 ‘진한 육부에 가을 연기 맑았으니/서울의 번화한 것 상상할 수 있다/만만파파 호를 가한 피리/ 가로 불어 세 성이 일천년을 누렸다’란 대목을 발견한 것. 저자 유득공은 이 시를 노래한 후 ‘서울은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신라의 국호는 서야벌(徐倻伐)인데 후대 사람들이 경도를 말하려면 서벌(徐伐)이라 하여 차츰 변하여 서울이 되었다’라는 해제를 달아 놓았다.
이 시를 근거로 김씨는 구한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 전집을 샅샅이 뒤져가며 서울의 한자 표기 사례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250권 50책에 이르는 방대한 백과사전의 한 구석에서 서울의 한자표기를 찾아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책과 씨름한 지 2년여만에 마침내 문제의 대목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10여 년 연구 끝에 서울의 한자 표기가 '徐울(초두 밑에宛)'이란 결정적 문헌을 찾아낸 서지학자 김시한씨. 앞에 쌓여 있는 것이 '증보문헌비고'다. 이밖에도 김씨는 1930년에 출간된 서울의 대표적인 지지인 ‘한경지략’의 서울 연혁부분에서 ‘서울은 수도라는 뜻이고 신라 때의 서야벌, 서벌이 후에 차츰 변하여 서울이라 하였다’라는 대목을 발견, 학계에 보고했다. 또 한글학자이자 한글사전 편찬위
원, 한글학회 이사를 지낸 이중화가 1918년 발간한 ‘경성기략’이란 저서의 1권에 ‘경성은 조선어에 서울이라 하니 경도, 즉 수도의 뜻이다.
10여년의 추적 끝에 서울 한자표기의 결정적 문헌을 발굴한 김시한씨는 “서울의 한자가 ‘徐울(초두밑에 宛) ’이란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한성’이란 모욕적인 표기법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은 관련 학자들과 연구가들의 탐구열 부족 탓”이라고 말했다.